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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99duuk 2024. 4. 8. 00:23

 

 

 

 
 

 

먼저 들 수 있는 한 가지는, 사는 일이 점점 바빠지고 매일매일의 생활속에서 웬만큼 자유로운 시간을 내기 어렵게 되었다는 점이다. 젊었을 때는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라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렇게 자질구레한 일이 많지는 않았다. 그런 잡다한 일이 나이를 먹억마에 따라 왠지 자꾸만 늘어가는 것 같다. 

 

강한 인내심으로 거리를 쌓아가고 있는 시기인 까닭에, 지금 당장은 시간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시간을 들여 거리를 뛰어간다. 빨리 달리고 싶다고 느껴지면 나름대로 스피드도 올리지만, 설령 속도를 올린다 해도 그 달리는 시간을 짧게 해서 몸이 기분 좋은 상태 그대로 내일까지 유지되도록 힘쓴다. 장편소설을 쓰고 있을 때와 똑같은 요령이다. 더 쓸 만하다고 생각될 때 과감하게 펜을 놓는다. 그렇게 하면 다음 날 집필을 시작할 때 편해진다. (...) 계속하는 것-- 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일단 리듬이 설정되어지기만 하면, 그 뒤에는 어떻게든 풀려 나간다. 그러나 탄력을 받은 바퀴가 일정한 속도로 확실하게 돌아가기 시작할 때까지는 계속 가속하는 힘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시 말하면 끝까지 달리고 나서 자신에 대한 자부심(혹은 프라이드와 비슷한 것)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장거리 러너에게 있어서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똑같은 경우를 일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소설가라는 직업에 이기고 지고 하는 일이란 없다. (...)잘 받거나 못받거나 하는 일은 뭔가를 이룩했는가의 하나의 기준이 될는지는 모르지만, 본질적인 문제라고는 할 수 없다. 자신이 쓴 작품이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도달했는가 못했는가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며, 그것은 변명으로 간단하게 통하는 일이 아니다. 타인에 대해서는 뭐라고 적당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 것은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것과 비슷하다.) 기본적인 원칙을 말한다면, 창작자에게 있어 그 동기는 자신안에 조용히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으로서, 외부에서 어떤 형태나 기준을 찾아야 할 일은 아니다.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유익한 운동인 동시에 유효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나는 매일매일 달리면서 또는 마라톤 경기를 거듭하면서 목표 달성의 기준치를 조금씩 높여가며 그것을 달성하는 데 따라 나 자신의 향상을 도모해 나갔다. 적어도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두고,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해 매일매일 노력해왔다. (...) 어제의 자신이 지닌 약점을 조금이라도 극복해나가는 것,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장거리 달리기에 있어서 이겨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거의 자신이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레이스의 기록이 향상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풀 마라톤의 기록은 썰물이 빠지듯, 완만한 속도이긴 했지만 계속 후퇴를 거듭했다. 달리는 일이 이전처럼 무조건 즐겁다는 생각도 들지 않게 되었다. 나와 '달리는 일'사이에는 그처럼 서서히 권태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거기에는 지불한 만큼의 노력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다는 실망감이 있었고, 열려 있어야 할 문이 어느 사이에 닫혀버린듯한 폐쇄감이 있었다. 그것을 나는 '러너스 블루'라고 이름 붙였다 .어떤 종류의 블루였던가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말하고자 한다. 

 

한 달에 260킬로가 '열심히 달린'것 이라고 한다면, 310킬로는 '성실하게 달린' 것이 될 터이다. 

 

(...) 사실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미리 말해두자면, 나는 어느 쪽이냐 하면, 혼자 있는 것을 별로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는 성격이다. 매일 1시간이나 2시간,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고 혼자 달리고 있어도, 4시간이나 5시간을 혼자 책상에 앉아 묵묵히 글을 쓰고 있어도 별로 고통스럽다거나 지루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경향은 젊었을 때부터 한결같이 내 안에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뭔가를 하기보다는 혼자서 말없이 책을 읽거나, 집중해서 음악을 듣는 쪽을 좋아했다. 혼자서 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생각해낼 수 있었다. 

그래도 젊어서 결혼을 하고 나서는 누군가와 함께 생활하는 일에도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음식점을 경영했기 때문에, 타인과 어울리는 일의 중요성도 알게 되었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참으로 당연한 일이지만-- 몸소 배웠다. 그 결과 다소 일그러진 형태를 취하고 있기는 하나, 사회성 같은 것도 서서히 몸에 익혀갔다. 이제 와서ㅓ 생각하면 20대의 10년 동안 나의 세계관은 적지 않게 변화했고, 인간적으로도 얼마간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온갖 경쟁과 다툼에 머리를 세게 부딪치면서, 살아남기 위한 실전적인 요령 같은 것을 터득해왔던 것이다. 이 10년간의 그 나름대로 힘든 생활 체험이 없었다면, 소설 같은 걸 쓰는 일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고, 또 쓰려고 생각해도 틀림없이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긴 해도 사람의 기본적인 성격은 그다지 급격하게 변하는 것이 아니다.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은 변함없이 항상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하루에 1시간쯤 달리며 나 자신만의 침묵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것은, 나의 정신 위생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업이었다. 적어도 달리고 있는 동안은 누구와도 얘기하지 않아도 괜찮고, 누구의 얘기도 듣지 않아도 된다. 그저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글쎄, 도대체 나는 달리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솔직히 말해서 내가 이제까지 달리면서 무엇을 생각해왔는지, 제대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 

(...) 나는 달려가면서 그저 달리려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원칙적으로는 공백 속을 달리고 있다. 거꾸로 말해 공백을 획득하기 위해 달리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공백 속에서도 그 순간순간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온다. 당연한 일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진정한 공백 같은 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은 진공을 포용할 만큼 강하지 않고, 또 한결같짇도 않다. 그렇다고 해도 달리고 있는 나의 정신 속에 스며들어 오는 그와 같은 생각(상녀)은 어디까지나 공백의 종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내용이 아닌, 공백성을 축으로 해서 성립된 생각인 것이다. 

달리고 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비슷하다. 여러 가지 형태의 여러 가지 크기의 구름. 그것들은 왔다가 사라져간다. 그렇지만 하늘은 어디까지나 하늘 그대로 있다. 구름은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하다. 그것은 스쳐 지나서 사라져갈 뿐이다. 그리고 하늘만이 남는다. 하늘이란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실체인 동시에 실체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이 넓고 아득한 그릇이 존재하는 모습을 그저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 이전에 단 한 번이라도 경험해본 일이라면, 좀 더 분명하게 여러 가지 일을 따져볼 수 있을 테지만, 아무래도 처음 겪는 일이기 때문에 그러게 간단히 치부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지금 나로서는 자질구례한 판단 같은 것은 뒤로 미루고, 거기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과 함께 우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마치 하늘이나 구름이나 강을 대하는 것처럼.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종류의 우스갯거리가 예외없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주 쓸모없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일상생활에 있어서나 직업적인 영역에 있어서나, 타인과 우열을 겨루고 승패를 다투는 것은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아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말을 하는 것 같지만,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있고 그것으로 세계는 성립되어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의 가치관이 있고,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이 있다. 나에게는 나의 가치관이 있고,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이 있다. 그와 같은 차이는 일상적으로 조그마한 엇갈림을 낳고, 몇 가지인가의 엇갈림이 모이고 쌓여 커다란 오해로 발전해갈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와 같은 괴로움이나 상처는 인생에 있어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이다, 라는 점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따. 생각해보면 타인과 얼마간이나마 차이가 있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자아란 것을 형성하게 되고, 자립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유지해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마음이 받게 되는 아픈 상처는 그와 같은 인간의 자립성이 세계에 대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당연한 대가인 것이다.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결과적이긴 하지만, 자진해서 고립과 단절을 추구했는지도 모른다. ... 그러나 그와 같은 타인으로부터의 고립과 단절은 병에서 새어 나온 산처럼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고 녹여버린다. 그것은 예리한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보호하는 동시에, 내벽을 끊임없이 자잘하게 상처 내기도 한다. 그와 같은 위험성을 나 나름대로 (아마도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말인데, 나는 신체를 끊임없이 물리적으로 움직여 나감으로써, 어떤 경우에는 극한으로까지 몰아감으로써, 내면에 안고있는 고립과 단절의 느낌을 치유하고 객관화해 나가야 했던 것이다.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직감적으로.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고 기대하고 있던 누군가로부터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때, 나는 언제나 여느 때보다 조금 더 긴 거리를 달리기로 작정하고 있다. 여느 때보다 더 긴 거리를 달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만큼 자신을 육체적으로 소모시킨다. 그리고 나 자신이 능력에 한계가 있는 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인식한다. 가장 밑바닥 부분에서 몸을 통해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 긴 거리를 달린 만큼, 결과적으로는 나 자신의 육체를 아주 근소하게나마 강화한 결과를 낳는다. 화가 나면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분풀이를 하면 된다. 분한 일을 당하면 그만큼 자기 자신을 단련하면 된다. 말없이 수긍할 수 있는 일은 몽땅 그대로 자신의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고... 이야기의 일부로 쏟아붓기 위해 노력해왔다. 

 

나는 나름대로 나이를 먹었고, 시간은 정해진 만큼의 몫을 받아간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것이 게임의 법칙인 것이다. 강이 먼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와 같은 자신의 모습을, 말하자면 자연 광경의 일부로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별로 유쾌한 작업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 결과로서 찾게 되는 것은, 그다지 기뻐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까지의 인생을 나 나름대로 -충분하다고는 말할 수 없더라도- 대충대충 즐기며 살아왔기 떄문에.

 

인생은 기본적으로 불공평한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가령 불공평한 장소에 있어도 그곳에 있는 종류의 '공정함'을 희구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에는 시간과 노력이 들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간과 노력을 들였지만 헛수고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 '공정함'에 굳이 희구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어떤가를 결정하는 것은 물론 개인의 재량이다. 

(…) 그런데 의지가 강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세상은 그처럼 단순하게 되어 있지는 않다, 라고 해도 무방하다. 솔직히 말하면 매일 계속해서 달린다는 것과 의지의 강약과의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별로 없다는 느낌마저 든다. 내가 이렇게 해서 20년 이상 계속 달릴 수 있는 것은, 결국은 달리는 일이 성격에 맞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다'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좋아하는 것은 계속할 수 있고, 좋아하지 않는 것은 계속할 수 없게 되어 있다. 

(…) 그래서 나는 달리기를 주위의 누군가에게 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달리는 것은 근사한 것이니까 모두 함께 달립시다" 같은 말은 되도록 입에 담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만약 긴 거리를 달리는 것에 흥미가 있다면, 그냥 놔둬도 그 사람은 언젠가 스스로 달리기 시작할 것이고, 흥미가 없다면 아무리 열심히 권한다고 해도 허사일 것이다.

 

'그렇고 말고. 이 정도도 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을 거야'

 

마라톤 마을의 아침 카페에서 나는 마음이 내키는 대로 찬 암스텔 비어를 마신다. 맥주는 물론 맛있다. 그러나 현실의 맥주는 달리면서 절실하게 상상했던 맥주만큼 맛있지는 않다. 제정신을 잃은 인간이 품는 환상만큼 아름다운 것은 현실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 몸이 둘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욕심을 내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달리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다. 매일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생명선과 같은 것으로, 바쁘다는 핑계로 인해 건너뛰거나 그만둘 수는 없다. 만약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달리는 연습을 중지한다면 틀림없이 평생 동안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작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지금도 아침 일찍 진구가이엔이나 아카사고쇼 주변 코스를 달리고 있으면, 그들의 기억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코너를 돌면 그들이 맞은편에서 하얀 숨을 내뿜으면서 묵묵히 달려 오는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이렇게 생각한다. 그만큼 혹독한 연습을 견뎌온 그들의 생각은, 그들이 품고 있던 희망과 꿈과 계획은 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렸을까, 하고. 사람의 생각은 육체의 죽음과 함께 그다지도 허망하게 사라져버리는 것인가, 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재능(전제조건)- 양과 질, 집중력(한정된 재능을 한 곳에 집약해서 쏟아 붓는 능력, 없으면 아무것도 달성할 수 없다), 지속력

 

어느 수준을 넘는 재능만 있따면 소설을 계속 써나가는 일이 그다지 어려운 작업은 아니다. 여러 가지 난관을 쉽게 극복할 수 있다. 젊다는 것은 몸에 자연스러운 활력이 충만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중력이나 지속력도 필요하다면 저절로 생긴다. 이쪽에서 굳이 애써 찾을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 젊고 재능이 있다는 것은 등에 날개가 돋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로움과 활달함도 많은 경우 젊음을 잃어감에 따라 차츰 그 자연스러운 기운과 선명성을 잃어간다. 이전에는 가볍게 할 수 있었던 일이 어떤 연령대를 지나면 그만큼 간단하게 할 수 없게 된다. 강속구 투수의 구속이 점점 떨어져가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물론 사람이 성숙해감에 따라서 자연스런 재능의 감퇴를 커버할 수도 있다. 강속구 투수가 어느 시점에서부터 변화구를 위주로 한 두뇌 피칭으로 전환해가듯이. 그러나 그러한 것에도 물론 한계가 있다. 거기에는 상실감의 안개와 같은 그늘도 어른거리게 된다. 

 

(…) 같은 10년이라고 해도, 멍하게 사는 10년보다는 확실한 목적을 지니고 생동감 있게 사는 10년 쪽이, 당연한 일이지만 훨씬 바람직하고, 달리는 것은 확실히 그러한 목적을 도와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쓰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상당히 완고하다는 것과 같을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내 근육은 완고하다. 근육은 기억하고 인내한다. 어느 정도 향상도 된다. 그러나 타협은 하지 않는다. 융통성을 부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이것이 나의 육체이다. 한계와 경향을 지닌 나의 육체인 것이다. 얼굴이나 재능과 마찬가지로 마음에 들지 않는 데가 있어도 달리 어쩔 수 없기 때문에 그대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나이를 더해가면 그런 안배가 자연스럽게 가능해지게 된다. 냉장고를 열어 거기에 있는 것만 써서 적당한(끄리고 어느 정도는 맛있는) 요리를 손쉽게 만들 수 있게 된다. 사과와 양파와 치즈와 우메보시밖에 없다고 해도 불평하지 않는다. 있는 것만으로 참는다. 뭔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나이를 먹어가며 얻게 되는 몇 안되는 장점 중 하나다. 

 

오랫동안의 연습이 가져온 누적된 피로가 앚기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여간해서 스피드가 나지 않는다. 이른 아침 찰스 강변을 내 페이스로 달리고 있노라면, 하버드의 신입생처럼 보이는 여자애들에게 저점 추월당한다. 그녀들 대부분은 날씬하게 마른 작은 몸집에, 하버드의 로고가 붙은 붉은 벽돌 셔츠를 입고 있다. 금발을 포니테일로 묶고, 신제품의 아이팟을 들으면서, 바람을 가르듯 일직선으로 도로를 달려간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알지 못할 공격적이고 도전적인 것이 느껴진다. 사람들을 차례로 추월해가는 것에 그녀들은 익숙해져 있는 듯하다. 

추월을 당하는 것에는 아마도 길들여져 있지 않을 것이다. 그녀들은 한눈에 봐도 우수하고 건강하고 매력적이고 진지하며, 그리고 자신에 대한 확신에 차 있다. 그녀들의 달리기는, 많은 경우 아무리 봐도, 장거리에 적절한 주법은 아니다. 전형적인 중거리 러너의 주법이다. 보폭은 크고, 발차기는 예리하고 강하다. 주변의 풍경을 보면서 느긋하게 달리는 것은 아마도 그녀들의 정신 상태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그에 비하면 나는, 내 자랑을 하는 건 아니지만, 지는 일에 길들여져 있다. 세상에는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산만큼 있고,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산더미처럼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녀들은 아직 그런 아픔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것을 지금부터 굳이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녀들의 유유히 흔들리는 자랑스러운 포니테일과 호리호리한 호전적인 다리를 쳐다보면서 나는 하릴없이 그런 생각을 한다. 그리고 페이스를 지키면서 느긋하게 강변도로를 달린다. 

나의 인생에도 그런 빛나는 날들이 존재했을까? 그렇다. 조금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때 내가 긴 포니테일을 갖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그녀들의 포니테일만큼 자랑스럽게 흔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당시의 내 다리는 지금 그녀들의 다리만큼 힘차게 지면을 박차고 나아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리라. 그녀들은 어쨌든 천하의 하버드 대학의 반짝반짝 빛나는 새내기들이니까. 

(…) 그러므로 그녀들에게 뒤에서부터 추월을 당해도 별로 분하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ㄷ 그녀들에게는 그녀들에게 어울리는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그것들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며,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예술가, 독소, 자가 면역, 젊음, 밸런스 붕괴}

 

아침부터 저녁까지 100킬로의 레이스를 완주했다. 이제 당분간 달리는 짓은 하지 않겠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미래의 일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질리지도 않고, 언젠가 또 울트라 마라톤에 도전하는 날이 돌아올는지도 모른다. 내일이 무엇을 가져올 것인가, 그것은 내일이 되지 않으며 알 수 없는 것이다. 

 

(…) 계속 달린다는 행위 속에 얼마만큼의 일반적인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일상성에서 크게 일탈한 것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사람으로서의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행위'가 항상 그렇듯, 아마도 어떤 종류의 특별한 인식을 당신의 의식에 반영하는 결과를 낳는다고도 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한 관조에 몇 가지 새로운 요소를 덧붙이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로서 당신 인생의 광경은 그 색깔과 형상을 바꾸어 나가게 될지도 모른다. 많건 적건, 좋건 나쁘건. 나의 경우에도 그와 같은 변화된 모습을 경험할 수 있었다. 

(…) 10년 만에 다시 읽어보니 그때 달리면서 생각하거나 느끼거나 했던 것이 무척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그 가혹한 레이스가 내 안에 어떤건 -기뻐할 만한 것, 그리고 그렇게 순순히 기뻐할 수 없는 것-을 남기고 갔는지, 대략적인 것을 여러분도 이해해줄는지 모른다. '그런 건 잘 알 수 없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지만.

 

느슨하게 돌아가는 육류 다지는 기계 속을 빠져 넘어가는 쇠고기와 같은 기분이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은 있지만, 아무튼 몸 전체가 말을 듣지 않는다. 자동차의 사이드브레이크를 힘껏 당긴 채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이 뿔뿔이 흩어져 당장이라도 해체되어 버릴 것 같다. 기름이 다 떨어지고 볼트가 풀리고 톱니바퀴의 아귀가 안 맞는 것이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하나의 순수한 기계다. 기계니까 아무것도 느낄 필요가 없다.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스트레칭을 하기 위한 휴식은 착실하게 취했다. 그러나 걷지는 않는다. 나는 걷기 위해서 이 레이스에 참가한 건 아니다. 달리기 위해 참가한 것이다. 그 때문에 -그 목적 하나를 위해- 비행기를 타고 일부러 일본의 북녘 끝까지 날아온 것이다. 아무리 달리는 스피드가 떨어졌따 해도 걸을 수는 없다. 그것이 규칙이다. 만약 자신이 정한 규칙을 한 번이라도 깨트린다면 앞으로도 다시 규칙을 깨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레이스를 완주하는 것은 아마도 어렵게 될 것이다. 

 

기록은 문제가 아니다. 지금에 와서는 아무리 노력을 해본들, 아마도 젊은 날과 똑같이 달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별로 유쾌한 일이라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일인 것이 분명하다. 나에게 역할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에도 역할이 있다. 그리고 시간은 나 같은 사람보다는 훨씬 충실하게, 훨씬 정직하게 그 직무를 다하고 있다. 아무튼 시간은,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생겨났을 때부터(도대체 그게 언제였을까?)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전진해오지 않았는가. 그리고 요절을 면한 사람에게는 그 특전으로서 확실하게 늙어간다고 하는 고마운 권리가 주어진다. 육체의 감퇴라고 하는 영예가 기다리고 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에 마치 조의를 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직후부터 열흘 넘게 뉴잉글랜드 지방에 차가운 비가 쏟아졌다. 초가을 장마였다.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하다가, 어떤 때는 불현듯이 그치기도 했지만, 단 한시도 말끔히 갠 적이 없었따. 하늘은 시종일관 이 지방 특유의 두터운 회색 구름에 덮여 있었따. 태도를 언제까지나 정하지 못한 사람처럼 비는 구질구질 계속 내리고, 마지막에는 마침내 작심한 듯 호우가 되었다. 

 

그러나 비가 내리면, '아, 어쩔 수 없다'하고 깨끗이 체념해버릴 수 있다. 그것은 좋은 측면이다. 

 

무릎의 안쪽에 아직 안 좋은 느낌이 얼마쯤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통증을 암시하는 감각이 거기에 있다. 그렇지만 어제처럼 뜨끔하는 것 같은 예리한 통증은 없다. 또 한 번 계단을 오르내려 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불안감은 떨쳐낼 수 없다. 한순간 내 눈앞을 스쳐간 검은 그림자는 정말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일까? 그것은 지금도 이 몸속 어딘가에 잠복해 있으면서 빈틈을 노리고 있는 게 아닐까? 큰 저택에서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몸을 숨기고 숨죽인 채, 집 안의 사람들이 모두 잠들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교활한 도둑처럼. 나는 내 몸의 내부를 눈을 부릅뜨고 들여다본다.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는 무엇인가의 모습을 확인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이 미로인 것처럼 우리의 몸 역시 또 하나의 미로인 것이다. 도처에 어둠이 있고, 도처에 사각이 있다. 도처에 무언의 암시가 있고, 도처에 이중성이 기다리고 있다.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경험과 본능뿐이다. 경험이 나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다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뭔가를 더 생각해본들 소용없다. 이제는 당일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본능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은 딱 한마디, '상상하라'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상상한다. 브루클린에서, (…) 내 모습을. 몇 개인지 모를 거대한 (…) 내가 넘아가고 있는 것을. 번잡한 센트럴파크 (…) 가까워지고 있을 때의 기분을. 레이스를 완주한 후에 (…) 스테이크 하우스를. 그런 광경은 온몸에 조용한 활력을 가져다준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캄캄한 어둠의 세계를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는 것을 그만둔다. 침묵의 울림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그만둔다. 

 

그런 무서운 일을 한 번이라도 당한 사람은 거기에서 몸소 사무치게 뭔가를 배우게 된다. 무슨 일의 기본은 착실하게 몸에 익히려면 많은 경우 육체적인 아픔이 필요한 것이다. 그 후로 아무리 지쳐도 얼굴만은 언제나 들고 있다. 전방의 노상에 있는 것을 무엇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쌍한 내 근육을 혹사하는 일이 된다. 

 

결과는 어땠는가? 솔직히 말해서 결과는 별로 좋은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마음속으로 남몰래 기대하고 있었던 만큼의 좋은 것은ㅇ ㅏ니었다. 나로서도 되도록이면 "만반의 준비를 한 덕분에 뉴욕 시티 마라톤에서 대단한 기록을 낼 수 있었다. 골인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라고 말할 만큼의 감격적인 말을 책 맨 뒤에 넣고, 웅장한 '<록키>의 테마곡'과 더불어 화려한 저녁 놀 속으로 멋지게 걸으며 사라지고 싶었다. 솔직히 말해서 실제로 레이스를 달려보기까지는 그렇게 전개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전개가 되어준다면 좋을 텐데,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그것이 내 첫 번째 계획이었다. 아주 멋진 계획이다. 

그러나 실제의 인생에 있어서는 만사가 그렇게 자기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우리가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필요에 쫓겨 명쾌한 결론 같은 것을 구할 때, 자신의 집 현관문을 똑똑똑 노크하는 것은 대부분 나쁜 소식을 손에 든 배달부이다. '언제나' 그렇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겠지만, 경험적으로 말해서 그것이 우울한 소식인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많다. 배달부는 모자에 잠깐 손을 대고 어쩐지 미안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지만, 그가 전해주는 소식의 내용이 조금도 나아지는 법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배달부 탓은 아닌 것읻. 배달부를 책망할 수는 없다.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불쌍한 배달부는 그저 위에서 부여받은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에게 그 일을 주고 있는 것은 친밀한 리얼리티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두 번째 계획이 필요하게 된다. 

 

 

왜냐하면"러너가 되시지 않겠습니까?"라는 누군가의 부ㅌ탁으로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던 것이 아닌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소설가가 되어주세요"라는 부탁을 받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 아닌 것처럼. 어느 날 나는 내가 좋아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좋아서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주위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고 저 내가 좋아서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주위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왔다. 설사 다른 사람들이 말려도, 모질게 비난을 받아도 내 방식을 변경한 일은 없었다. 그런 사람이 누구를 향해서 무엇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거기에는 친절한 마음의 편린 같은 것이 보일까? 아니다, 보이지 않는다. 태평양 상공에 덩그러니 떠 있는 무심한 여름 구름이 보일 뿐이다. 그것은 나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구름은 언제나 말이 없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보거나 하는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시선을 향해야만 하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안쪽인 것이다. 나는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린다. 깊은 우물의 바닥을 보는 것처럼. 거기에는 친절한 마음이 보일까? 아니,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보이는 것은 언제나 같은 나의 성격일 뿐이다. 개인적이고, 완고하고, 협조성이 결여된, 때로 자기 멋대로인, 그래도 자신을 항상 의심하며,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거기에 우스꽝스러운-또는 우스꽝스러움과 비슷한-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나의 본성이다. 낡은 보스턴백처럼 그것을 둘러메고, 나는 긴 여정을 걸어온 것이다. 좋아서 짊어지고 온 것은 아니다. 군데군데 터진 곳도 보인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짊어지고 갈 것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메고 온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애착도 간다.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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