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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철학하다 221~

99duuk 2024. 11. 6. 11:46

 

 

이는 생물학자가 말하는 ‘본능적’ 사랑의 감정에 반한다. 왜 굳이 그래야 하는가? “우리 자신의 친구들에게(즉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베푸는 자비와 사랑은 사실 집착입니다. ‘나의 것’이고 ‘나의 친구’이고 ‘나’를 위해 좋은 것이라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집착입니다. (…) 태도나 이해관계가 달라지면 친구였던 사람을 남보다 더한 미움과 증오로 적대하게 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런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신에 대한 애착의 연장선상에 있는 사랑이다. 

이웃이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다. 통상적으로는 공간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뜻한다. 공간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만 이웃은 아니다. 하는 말이 비슷한 사람들, ‘핏줄’로 연결된 사람들, 사고방식이 비슷한 사람들, 감각이 비슷한 사람들 또한 모두 이웃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 혹은 비슷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나로부터 가족으로, 그리고 핏줄로 연장된 사람들이나 공간적으로 연장된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자연스런' 일이고 쉬운 일이다. (…) 그것은 모두 나와 가까운 것, 나와 비슷한 것에 대한 사랑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사랑이다. 
 좀 더 냉정하게 말하면 이런 사랑은 나와 비슷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통해 나의 둘레에 보호벽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 널리 퍼져 있는 것과 다른, 지금은 아주 생소한 어떤 감각을 가진 사람들, 아직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감각이나 생각을 가진 낯선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비슷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만, 나와 이질적이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쉽고 자연스러운 것은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행해지겠지만, 낯설고 쉽지 않은 것은 애써 가르쳐도 행하기 어렵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상이한 차원의 자비를 구별한다. 중생연자비와 법연자비, 무연자비가 그것이다.
 ‘중생연자비’는 고통스러워하는 중생의 현실적인 모습을 보고 연민의 마음을 일으켜서 행하는 자비다. 이는 고통과 번뇌를 통해 행해지는 것이니, 번뇌를 끊지 못한 중생이 행하는 자비이다. 즉 중생이 다른 중생과의 관계 속에서 행하는 자비다. 동정이나 연민은 이런 자비의 범주 안에 들어가며, 고통과 연민 없이 기쁨을 주는 것도 여기에 들어간다. 
 ‘법연자비’는 일체제법을 깨닫고 행하는 자비다. 자연의 법칙이나 세간에서 작동하는 마음의 법칙을 깨달은 사람이 행하는 자비행이다. 자신과 가까운 이웃이나 멀리 떨어진 이웃 모두에게 평등심을 안고 대하려 하고, 생각이나 감각이 자신과 가깝든 멀든 남들과의 만남에서 언제나 기쁨의 증가와 슬픔의 감소를 추구하는 자비행이 여기에 들어간다. 
 ‘무연자비'는 온갖 차별된 견해를 여읜 절대평등의 경지에서 제법의 진여실상을 깨달은 사람이 행하는 자비다. 현행화된 연, 즉 연기적 조건을 거슬러 올라가 모든 중생이 잠재적 부처라는 점에서 절대평등함을 깨달은 사람이 행하는 절대적 자비다. 모든 중생이 부처임을 알고, 그들과 부처로서 만나고 응대하며, 부처 간의 우정을 나누는 것이다. 



(…)  “깨달은 사람처럼 살라”는 것이었다. 평생을 깨달은 사람처럼 산다면, 깨달은 사람으로 산 것이다. 깨달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보살행이란 그렇게 깨달은 사람처럼 사는 삶을 지칭하는 말이다. “네가 만나는 이들에게 최대한 기쁨을 주고 최대한 슬픔을 덜어주며 살라” 고 요약될 수 있는 자비행은 이런 보살행의 일부이다. 물론 ‘자리이타’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이는 남에게만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로 자와 비의 행을 행해야 한다. 


 자비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눈앞의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나, 그의 고통을 나서서 덜어주는 것을 무조건 자비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로 하여금 부처라는 말에 그넙한 사고와 행동을 하도록 촉발하는 것이 바로 자비행의 요체이다. 악행을 한다고 판단된다면,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악행들, 남에게 고통을 주는 일들로 인해 불편함이나 고통을 느끼도록 해야한다. 대부분의 경우 저항 없이는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지 못하고, 고통 없이는 자신의 올바른 삶이 무언지에 대해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저항과 고통이라는 스승을 만나 그들이 부처를 향해 살아갈 수 있도록 반복하여 마찰의 촉발을 일으켜야 한다. 세간에 악행의 업을 쌓는 것을 최소화하도록 해야한다. (…)


 

일체유심조의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라 내게 다가와 나를 둘러싼 것들에 속한 마음이다. 음식에 마음이 속한다는 말이나 TV에 마음이 있다는 말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의식'이 아니다. 나의 마음이라고 할 때 그것은 나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고, 그 행동에 의해 내가 만난 무언가에 작용하여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이다. 양파와 감자에 적용하여 잘게 자르도록 하고 섞어서 요리하는 것이 나의 마음이라면, 마찬가지로 나에게 작용하여 내 손발을 움직이게 하는 것, 내가 생각지 못한 쇼핑을 하게 한 것 또한 마음이라 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런 마음들을 관통하는 것을 지칭하는 마음이란 개념을 다시 생각할 수 있다. 하나하나의 마음이 아니라 그런 모든 마음을 묶어서 마음이라는 하나의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음이란 어떤 것에 작용하여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외부에서 다가왔던 것은 어느덧 지나가거나 물러서면 사라진다. 그러나 내부화된 것들은 지나간 뒤에도 남으며, 물러선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이 겪은 마음들을 내부에 기억하고 기록해두며 그것에 따라 자신에게 다가올 사태를 예상하고 준비한다. 기근을 겪은 태아의 유전자가 기근을 예상하여 최대치로 영양소를 흡수하고 집적하는 능력을 가동시키고, 살아남으려는 마음을 신체에 담아 지속시키듯이, 빛이 사라진다고 해서 우리의 눈이 금방 사라지지는 않듯이. 이는 마음이란 말로 표현되는 신체를 움직여 반응하며 작용하고 변화를 만드는 능력에 안정성과 지속성을 제공한다. 하지만 동시에 달라진 조건에 부적절하게 대처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궁핍을 경험한 사람이 궁핍에 대비하는 데 현재의 삶을 아니 미래의 삶조차 귀속시켜버리고, 성공을 경험한 사람이 그 성공에 안주하여 다른 삶의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경우가 그렇다. 이것이 심해지면 과거의 경험에 고착되어 증상적인 행위를 반복하는 병적인 마음이 되기도 한다. 생존을 지속하려는 마음이 과거의 어떤 것에 집착하여 스스로의 작용능력을 고정하고 제한하는 것이다. 내부화된 마음은 변화된 조건에서 분리된 삶을 살려는 마음의 작용을 유지하고 지속해간다. 생명체의 마음이 종종 관성적/타성적 성향을 갖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바깥에서 다가와 내 마음 속에 들어왔던 것들을 '나의 것'으로 내부화된 것이 나의 마음이다. 하여, 우리의 마음은 우리에게 다가온 외부에 대해 나름의 내부화된 방식으로 반응하며 작용한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이라면 일종의 '조건반사'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것은 다양한 종류의 습관이나 기억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이 대단히 불확정적인 방식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같은 음반의 동일한 음악이지만, 어떤 때는 몰두하여 감동하며 듣게 되고 어떤 때는 귀에 겉도는 소리로 듣게 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고, 같은 봉투에서 나온 똑같은 차이건만 어떤 때는 맛있다고 반응하고 어떤 때는 맛없다고 반응하는 게 우리의 마음이다. 마음이란 이런저런 양상으로 내부화되고 '고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래는 어떤 자성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연기적 조건과 함께 다가온 마음에 반응하여 작용을 만들어낼 능력일 뿐, 어떻게 반응할지는 애초에 정해진 것이 없다.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기계나 사물 또한 다르지 않다. (…) 반응하지 않으며, 항상 똑같이 작동하지 않는다. (…) 흔히 '창발'이라고 부르는 이런 현상은 자연계에서도 나타난다. 

 이런 미결정성과 불확정성의 폭이 커서 지나간 경험에 비추어 판단하는 능력이 과거의 패턴을 벗어날 가능성을 가질 때 우리는 '생명'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마음이 가진 미결정성의 정도가 내부화된 것에 따른 관성적인 반응을 벗어나는 정도의 크기를 가질 때, 내부화된 주름은 예상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펼쳐질 수 있다. 자신이 만난 조건에 대응하며 다른 주름들을 만들면서 펼쳐지는 그런 작용의 양상이 그때 나타나게 된다. 상이한 기억들 가운데서 좀 더 나은 작용의 양상을 찾아내는 학습능력이나, 기억된 것을 변형시켜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내는 창안능력이 이런 종류의 마음에 속한 것이다. 이로 인해 자신이 만나게 되는 것들에 대처하여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은 고양될 수 있다. 관성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서 벗어나 다른 사고와 행동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능력은 이로부터 나온다고 할 것이다. 

 '수행'이란 "행을 닦는다는 말"이다. 이란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마음이고 그럼으로써 행동을 만들어내는 마음이다. 그 마음은 35억년의 역사를 갖는 과거의 '숙업'이 쌓여 만들어진 능력이고, 일상적인 생존을 위해 신체의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습관적인 의지들이며, 자신이 만났던 과거의 경험이 내부화되어 만들어진 마음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관성적/타성적인 성향을 갖는다. 즉 하던대로 하려는 성향, 하던 것을 계속하려는 성향이다. 관성적인 성향만을 갖고 있다면, 인간이든 생명이든 관성적인 힘에 의해 운동하는 사물과 다르지 않다. '생명'이란 이름에 부합하는 것은 그 관성적인 힘에서 벗어나는 이탈의 선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 안에 존재하는 미결정성의 힘을 가동시켜 관성적인 선에서 벗어나는 선(이를 에피쿠로스는 '편위선 clinamen'이라 명명하고, 들뢰즈는 '탈주선'이라고 명명한다)을 그릴 수 있을 때, 새로운 삶의 방식과 다른 삶의 가능성이 그 마음 안에 형성된다. "행을 닦는다"함은 자신의 마음이 작용하는 양상을 지켜본면서 관성적인 힘에서 벗어나는 이탈의 선을 그리는 능력을 증장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부처란, 연기법의 작용을 통찰하여 그에 응하되 내부화된 성향에 머물지 않고 그때마다 적절한 대응의 양상을 찾아내는 능력에 부여된 이름이다. 어떤 결정성도 갖지 않기에 어떤 연기적 조건에도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그런 능력 자체에, 능산적인 능력으로서의 마음이라고 했던 그런 능력에 붙인 이름이 부처다. 애초에 모든 마음이 그렇기에, 비록 내부화되어 안정적이지만 동시에 관성적인 마음의 작용을 넘어서, 관성적인 힘에서 벗어나 이탈의 선을 그리는 능력이 바로 부처다. 

 

 

 대기도, 물도 빛도, 온도도 무상한 변화의 흐름이고 신체의 움직임 또한 그러하다. 무한속도로 변화한다. 무한속도로 변화하는 세계, 말 그대로 카오스다. 이 카오스 속에서 생명체는 살아야 한다. 살려는 의지는 이 카오스를 향해 신체를 밀어붙인다. 그러나 살기 위해선 조심스레 다가가야 한다. 사는 데 필요한 어떤 단서를 카오스로부터 찾아내야 한다. 카오스적 변화를 따라갈 수 있게 해줄 단서를 포착해야 한다. 하지만 무한속도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포착할  수 없기에, 작은 단서라도 잡으려면 변화 속에서 반복되는 것을 포착해야 한다. 인근에 있는 것들에서 반복되는 단서를 포착해야 한다. 인근에 있는 것들에서 반복되는 단서를 포착해야 한다. 반복되는 것들을 연결하고 반복되는 속도와 리듬을 포착해야 한다. 그렇게 되돌아오는 것의 성질을 파악해야 한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자연의 변화를 되돌아오는 계절의 반복으로 파악하고, 비슷한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것들을 '같은 동물'로 파악한다.

 되돌아오는 것들을 연결하며 우리는 변화를 '파악'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통해 변화하는 세계에 대응하며 살 길을 찾는다. 이는 무한속도의 변화를 감속시키는 것이다. 유한의 속도로 바꾸고 그 유한의 속도마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다운'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그때마다 하나의 상을 만들고 그림을 그려 보여주며 거기에 이름을 붙인다. 이는 이후에 유사한 상황을 만났을 때 판단의 자원이 된다. 물론 우리만 그런 것은 아니다. 토끼도, 거북이도 (…) 생명체는 모두 나름의 방법으로 유사하거나 비슷한 것들을 하나로 묶고 그것에 이름 붙이며, 그렇게 포착된 것들을 분류하고 연결한다. 반복적으로 만나는 것들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게 한다. 반복적으로 만나는 것들에 나름대로 이름을 붙이고, 이름이 붙여진 것들은 하나의 동일한 대상으로 간주한다. 그렇게 명명된 대상들을 연결하고 직조함으로써 나름의 세계를 구축한다. 인간들은 이를 무명의 카오스와 달리 질서의 세계, '코스모스'라고 명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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