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성적 능력이 우리 능력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정한다. 우리는 쾌락과 고통을 느낄 능력도 있다. 그는 우리가 이상적 동물일 뿐 아니라 지각력 있는 동물이라고 말한다. 칸트가 말하는 "지각력"이란 감각과 느낌에 반응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벤담도 옳지만, 절반만 옳을 뿐이다. 벤담은 우리가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는 옳은 이야기다. 그러나 쾌락과 고통이 "우리의 통치권자"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칸트는 이성이야말로, 적어도 때로는,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성이 우리 의지를 통치할 때, 우리는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욕망에 내몰리지 않는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 두 가지 능력이 합쳐져 우리는 특별한 존재,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존재가 된다. 이 능력으로 우리는 단지 식욕만을 느끼는 동물에서 벗어난다.
칸트의 도덕철학을 이해하려면 그가 말하는 자유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자유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칸트의 생각은 다르다. 그가 생각하는 자유는 좀더 엄격하고 까다로운 개념이다.
칸트의 논리는 이렇다. 다른 동물처럼 쾌락이나 고통 회피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는 대개 삶을 좋아해서지, 그게 의무라서가 아니다. 칸트는 여기서 의무 동기가 나타나는 예를 제시한다. 가령 희망을 잃은 비참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절망에 가득 찬 이 사람은 살고 싶은 욕구가 없다. 이 사람이 마음이 끌려서가 아니라 의무감에서 삶을 보존하려는 의지를 다진다면, 그의 행동에는 도덕적 가치가 있다.
칸트는 비참한 사람만이 목숨을 보존하는 의무를 다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올바른 이유로 그러니까 어떤 의무감에서 삶을 사랑하고 보존할 수도 있다. 자신의 삶을 보존해야 하는 의무를 인삭하고 그 이유를 염두에 두고 살아간다면, 계속 살고 싶은 욕구가 있다해도 삶을 보존하는 행위의 도덕적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제 칸트가 생각한, 도덕과 자유의 연관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도덕법을 생각해, 의무감에 따라 행동한다는 뜻이다. 도덕법은 정언명령인 인간 자체를 목적으로 여겨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이루어진다. 정언명령에 따른 행동만이 자유로운 행동이다. 가언명령에 따른 행동은 외부에 주어진 이익이나 목적을 의식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나는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내 의지는 내가 아닌 외부 힘에 의해, 내가 놓인 환경의 필요에 의해, 어쩌다 생긴 내 바람과 욕구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자율적으로 행동할 때,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할 때만이 본성과 환경의 명령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한 법칙은 특정한 바람이나 욕구에 구애받지 않는다. 따라서 칸트가 말하는 자유와 도덕의 까다로운 개념은 서로 연결된다. 자유롭게 행동하기, 즉 자율적으로 행동하기란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즉 정언명령에 따라 행동하기와 똑같은 하나의 개념이다.
칸트는 도덕과 자유에 대한 이런 사고방식으로 공리주의를 철저히 비난한다. 특정한 이익이나 욕구(행복이나 공리 따위)를 도덕의 기초로 삼으려는 노력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결코 의무가 아니며, 특정한 이익을 위해 행동할 필요성이기 때문이다." 이익을 기초로 한 원칙은 "언제나 조건적이며, 도덕법이 될 수 없다."
의문 1: 칸트의 정언명령은 모든 사람을 목적으로서 존중하라고 한다. 이는 성서에 나오는 '황금률'(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과 똑같지 않은가?
답: 그렇지 않다. 황금률은 사람들이 어떻게 대우받고 싶어하는가라는 불확정적인 요소에 의존한다. 정언명령은 그러한 불확정성에서 벗어나, 특정 상황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든 그들을 이성적 존재로 존중하라고 한다. (…)
의문 2: 칸트는 의무에 답하는 것과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똑같은 하나로 보는 것 같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의무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은 법칙을 지킨다는 뜻이다. 법칙에 복종하는 것이 어떻게 자유와 양립할 수 있단 말인가?
답: 의무와 자율은 특별한 경우, 즉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칙을 나 스스로 정했을 때만 양립한다.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나의 존엄성은 도덕법에 종속되는 데 있지 않고, 내가 "바로 그 법"을 정하고, "바로 그 이유로 그 법에 종속되는 데" 있다. 우리는 정언명령에 다를 때 우리가 선택한 법칙에 따르게 된다. "인간의 존엄성은 다름 아닌 보편적 법칙을 만드는 능력에 달렸다. 자신이 만든 법에 스스로 종속된다 하더라도 그러하다."
의문 3: 자율이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한다는 뜻이라면, 모든 사람이 똑같은 도덕법을 선택하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정언명령이 내 의지의 산물이라면 사람마다 정언명령이 서로 다르지 않겠는가? 칸트는 우리 모두 똑같은 도덕법에 찬성하리라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사람마다 이성적 사고가 다르니, 서로 다른 도덕법을 주장하는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답: 도덕법을 정할 때, 우리는 당신이나 나 같은 특정한 사람으로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존재. 칸트가 "순수 실천 이성"이라 부른 것에 참여하는 존재로서 선택한다. 따라서 도덕법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생각은 오해다. 물론 우리가 특정한 이익, 욕구, 목적에 따라 판단한다면, 수많은 원칙이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도덕 원칙이 아니라 단순히 신중한 원칙일 뿐이다. 우리는 순수 실천 이성을 발휘한다면 누구나 똑같은 결론에, 유일한 (그리고 보편적인) 정언명령에 이른다는 뜻이다. "따라서 자유의지와 도덕법에 따른 의지는 똑같은 하나다."
(…) 그보다 더 열심히 연습하는 선수들도 있다. 그렇다고 연습 시간을 고려해. 그들이 조던보다 더 높은 연봉으로 계약할 자격이 있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능력 위주 사회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을 떠들어도, 그들이 진정으로 보상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은 기여한 내용이나 업적이다. 노동윤리를 갖는 게 노력의 결과든 아니든, 우리가 기여한 것들은 어느 정도는 공을 내세울 수 없는 타고난 재능에서 나온다.
(…) 다양성 논리를 내세우는 이들은 입학 허가를 수혜자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본다.
다양성이란 공동선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논리다. 이때의 공동선은 학교의 공동선이자 사회의 공동선이다. 우선, 학생들 사이에 여러 인종이 고루 섞여 있으면, 출신 배경이 비슷한 학생들끼리 모여 있을 때보다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 무척 바람직하다. 학생들이 모두 특정 지역 출신이라면 지적/문화적 시야가 제한될 수 있듯이, 인종,민족, 계층이 모두 동일한 경우 역시 그러할 것이다. 둘째로, 여건이 불리한 소수집단 학생들을 교육해 핵심 공직이나 전문직에 나아가 지도력을 발휘하게 한다면, 대학은 지역 발전과 공동선에 더 크게 기여할 수 있다.
(…)
다양성 논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반박을 내놓는다. 하나는 현실적 반박이고, 또 하나는 원칙적 반박이다. 현실적 반박은 소수집단우대정책의 효과에 의문을 품는다. 인종별 우대정책은 다원화 사회를 활성화하거나 편견과 불평등을 줄이기 보다는 소수집단 학생들의 자부심을 훼손하고, 모든 집단이 인종을 더욱 의식하게 만들며, 인종간의 긴장을 높이고, 자신도 행운을 누려야 할 사람이라고 느끼는 백인들의 분노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 반박은 소수집단우대정책이 부당하다는 게 아니라, 그 정책이 목적을 달성하기 어(…)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규율이나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으로 흔히들 생각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그러한 생각은 도덕적 미덕의 두드러진 특징을 비켜간다. 올바른 규칙은 아는데, 그것을 언제 어떻게 적용할지 모를 수 있다. 도덕 교육은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규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판단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행동과 관련된 문제나 우리에게 무엇이 이로운가의 문제는, 건강이 그렇듯 늘 변하기 마련이다. (…) 행위자 스스로 이 상황에는 어떤 행동이 적절한지 그때그때 파악해야 한다. 치료나 항해를 할 때와 마찬가지다.
도덕적 미덕에 관해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극단 사이의 중용으로 이루어진다는 점뿐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슨느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화가 그다지 도움이 못 된다는 점을 그도 인정한다. 주어진 상황에서 중용을 식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적절한 사람에게, 적절한 정도로, 적절한 때에, 적절한 동기를 가지고, 적절한 방법으로" 옳은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습관이 아무리 필수라 해도 도덕적 미덕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늘 새로운 상황이 생기고, 특정 상황에서 어떤 습관이 적절한지 알아야 한다. 따라서 도덕적 미덕에는 판단이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천적 지혜"라 부르는 지식이다.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을 다루는 과학 지식과 달리, 실천적 지혜는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관한 것이다. 실천적 지혜는 "특정 상황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실천하는 지혜이고, 실천은 특정 상황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적 지혜를 "선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의 이성적이고 진실한 상태"라고 정의한다.
실천적 지혜는 정치적인 면이 내재된 도덕적 가치다. 실천적 지혜가 있는 사람은 자신뿐만 아니라 같은 시민들에게 그리고 인류 전체에 무엇이 이로운지 심사숙고 할 줄 안다. 심사숙고는 철학적 사고가 아니다. 언제든 바뀔 수 있는 특정 상황에 관심을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행동에 주목한다. 하지만 단순히 계산에 머물지 않는다. 주어진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인간의 최고선을 찾아내려 한다.
우리는 이제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정치를 여러 소명 중 하나가 아니라 좋은 삶의 필수 요소라고 생각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첫째, 폴리스의 법은 우리에게 좋은 습관을 심어주고 좋은 인격을 형성하여, 시민의 미덕을 갖추게 한다. 둘째, 시민의 삶은 자칫 휴먼 상태에 빠지기 쉬운 심사숙고 능력과 실천적 지혜를 발휘하게 한다. 집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구석에 틀어박혀, 어떤 정책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중요한 행동을 같이 하고 공동체 전체의 운명을 책임지는 것과는 다르다. 실제 무대로 올라가 대안을 저울질하고 , 우리 생각을 논의하고, 통치하고 통치 받을 때만이, 한마디로 시민이 될 때만이 심사숙고에 능숙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시민은 우리가 생각하는 시민보다 더 숭고하고 까다로운 존재다. (…)
그러나 사죄나 집단적 책임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자유에 대한 개인주의자들의 시각은 오늘날의 정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러 정의론에 등장한다. 그러나 나를 비롯해 이 시각에 문제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공적인 삶의 근본 특징 몇 가지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합의와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개념은 오늘날의 정치뿐만 아니라 근현대의 정의론에서도 크게 부각된다. 선택과 합의에 관한 다양한 개념이 어떻게 오늘날의 사고를 형성했는지 한번 돌아보자.
선택하는 자아라는 생각은 존 로크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합법 정부는 반드시 합의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 그럴까? 우리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이지, 아버지의 권위나 왕의 신권에 종속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천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고 독립적이며, 어느 누구도 이 상태를 벗어나 자신의 합의 없이 다른 정치권력에 예속될 수 없다."
한 세기가 지나 이마누엘 칸트는 선택하는 자아에 관해 더욱 호소력 있는 논리를 제시했다. 칸트는 공리주의와 경험주의 철학자들에게 맞서, 우리는 스스로를 취향과 욕구의 덩어리 이상의 존재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롭다는 것은 자율적이라는 뜻이고, 자율적이라는 것은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지배된다는 뜻이다. 칸트식 자율은 합의보다 더 까다롭다. 내가 도덕법을 따른다고 할 때, 그것은 단지 우연히 생겨난 욕구나 충심에 따라 선택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특정한 이해관계와 애착에서 한 걸음 울러나 순수 실천 이성을 따르는 사람으로 행동한다는 뜻이다.
20세기에 존 롤스가 칸트의 자율적 자아 개념을 받아들여 그것을 토대로 정의론을 주장했다. 칸트와 마찬가지로 롤스 역시 우리 선택에는 도덕적으로 임의의 요소들이 반영되는 경우가 많음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노동력을 착취하는 공장에서 일하기로 했을 때, 그것은 어려운 경제 사정에서 나온 선택이지,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다. 따라서 자발적 합의에 기초한 사회를 원한다면, 실제 합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우리의 특정한 이해관계와 이점을 접어두고 무지의 장막 뒤에서 선택한다면 어떤 정의의 원칙에 동의하겠는가를 물어야 한다.
자율적 의지에 관한 칸트의 생각과 무지의 장막 뒤에서 이루어지는 가언합의에 관한 롤스의 생각에는 공통점이 있다. 도덕적 행위자를 특정한 목적이나 애착에 구속되지 않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도덕법(칸트)을 따르거나 정의의 원칙(롤스)을 선택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위치를 정하고 지금의 우리를 만든 역할이나 정체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만약 정의를 생각할 때 특정한 정체성을 배제해야 한다면, 오늘날 독일인이 유대인 대학살을 배상할 특별한 책임을 떠맡거나 현 세대 미국인이 노예제나 인종차별정책의 부당함을 배상해야 할 특별한 책임을 느낄 이유는 없다. 왜 그럴까? 일단 독일인,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배제하고, 나를 자유롭고 독립된 자아라고 생각한다면, 그 같은 역사적 부당함을 배상해야 할 책임이 다른 사람이 아닌 내게 있다고 말할 근거가 없다.
인간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라는 생각은 여러 세대에 걸친 집단적 책임뿐만 아니라 훨씬 폭넓은 문제에 영향을 미친다. 도덕적 행위자에 대한 이런 사고방식은 정의를 좀더 일반적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가 자유로운 선택권을 지닌 독립적 존재라면, 우리 권리를 규정하는 정의의 원칙을 설정할 때 특정한 도덕적/종교적 사고에 좌우되지 말아야 하며, 좋은 삶을 규정하는 서로 다른 시각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 노력해야 한다.
(…)
칸트와 롤스가 보기에, 좋은 삶에 대해 종교적으로든 세속적으로든 특정한 개념을 강조하는 정의론은 자유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정의론은 타인의 가치를 강요함으로써, 인간을 자기 목표를 선택할 능력이 있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로 존중하지 않는다. 이처럼 선택이 자유로운 자아와 중립 상태는 밀접하게 연관된다. 여러 목적에 구애받지 않는 중립적인 권리의 틀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중립은 도덕적/종교적 논란에서 어느 쪽도 편들지 않으며, 시민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선택할 자유를 부여한다.
정의론과 권리는 도덕적으로 중립을 지킬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분명 맞는 이야기다. 칸트와 롤스는 도덕적 상대주의자는 아니다. 자기 목적은 자기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대단한 도덕적 사고다. 하지만 어떻게 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어떤 목적을 추구하든,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한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그만이다. 중립적 틀의 매력은 어떻게 살아야 바람직하고, 무엇이 좋은 삶인지 단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칸트와 롤스는 자신들이 특정한 도덕적 이상을 지지한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들은 선을 이야기하면서 권리를 배제하는 이론에 대항한다. 공리주의도 그중 하나다. 공리주의는 쾌락 또는 행복 극대화 선으로 간주하면서, 권리에 초점을 둔 어떤 제도가 그것을 성취하겠느냐고 묻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에 관해 사뭇 다른 이론을 제시한다. 그가 말하는 선은 쾌락을 극대화하는 게 아니라 우리 본성을 실현하고 인간 고유의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다. 인간의 선을 미리 정해놓고 그것을 바탕으로 추론한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추론은 목적론적이다.
이는 칸트와 롤스가 거부하는 추론법이다. 두 사람은 권리를 선보다 앞세운다. 의무와 권리를 정하는 원칙은 좋은 삶에 대한 주관적 견해에 기초해서는 안 된다. 칸트는 "도덕의 최고 원칙을 둘러싼 철학자들의 혼동"을 이야기한다. 고대 철학자들은 "윤리적 고민을 최상의 선을 정의하는 데 온통 쏟아 붙고는" 그 선을 "도덕법을 결정하는 근거"로 삼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나 칸트에 따르면, 이는 앞뒤가 바뀐 일이다. 자유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가 자신을 자율적 존재로 여긴다면 도덕법부터 정할 일이다. 그런 뒤에야, 즉 의무와 권리를 규정할 원칙에 도달한 뒤에야, 비로소 그 원칙에 맞는 선이 무엇인지 물을 수 있다.
(…)
하지만 공리주의 정의론이 롤스와 칸트의 유일한 표적은 아니다. 권리를 선에 앞세우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정의 역시 문제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정의를 추론하는 것은 문제가 되는 선의 텔로스, 즉 본질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공정한 정치 질서를 고민하려면, 좋은 삶의 본질부터 따져야 한다. 어떤 삶의 방식이 최선인가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공정한 헌법의 틀을 잡을 수 없다. 그러나 롤스는 생각이 다르다. "목적론적 원칙의 체계에는 심각한 오류가 존재한다. 그 원칙은 애초부터 권리와 선을 잘못 연관시킨다. 우리는 독립적으로 규정된 선을 보고 그에 따라 삶의 틀을 형성하려 해서는 안 된다."
(…)
권리가 선에 앞서야 한다는 롤스의 주장은 "도덕적인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목적의 주체다"라는 신념을 반영한다. 우리는 도덕적 행위자로서,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 능력으로 규정된다. "우리 본성을 일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목적이 아니다." 그보다는 목적에서 떨어져 나올 때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틀이 중요하다. "자아는 목적에 앞서고, 목적은 오직 자아에 의해 확정될 수 있기 때문(…)
(…) 그는 <<덕의 상실>> 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도덕적 행위자로서 목적과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매킨타이어는 인간을 자발적 존재로 보는 시각의 대안으로 서사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다. 우리는 서사적 탐색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답하려면 그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매킨타이어가 관찰하기에, 모든 체험된 서사에는 특정한 목적론이 깃들어 있다. 이는 외적 권위가 부여한 고정된 목적이나 목표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목적과 예측 불능은 공존한다. "허구의 서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우리도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삶에는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특정한 형식이 있다."
삶이란 특정한 통합이나 일관성을 갈망하는 서사적 탐색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갈림길에 마주쳤을 때, 우리는 완전한 삶, 내가 관심을 갖는 삶으로 이끄는 길을 찾아내려 애쓴다. 도덕적 고민은 내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 내 삶의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에 가깝다. 여기에는 선택이 끼어들지만, 그것은 해석에서 나오는 선택일 뿐, 의지에서 나오는 절대적 행위가 아니다. 내 앞에 놓인 어느 길이 내 삶의 궤적과 가장 잘 어울리는지는 나보다 남이 더 분명히 알 수도 있다. 도덕적 행위자를 서사로 설명하는 방식에는 이러한 가능성을 허용하는 미덕이 있다.
이 설명은 내 삶이 속한 더 큰 삶에서 도덕적 고민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매킨타이어는 이렇게 쓴다. "나는 개인이라는 '자격'만으로 결코 선을 추구하거나 미덕을 실천할 수 없다. 내가 속한 이야기와 타협할 때만이 내 삶의 서사를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매킨타이어에게 도덕적 고민의 서사적 또는 목적론적 측면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랬듯이) 전체의 일부라는 소속과 밀접히 연관된다.
우리는 누구나 특정한 사회적 정체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이해한다. 나는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딸, 또는 사촌이거나 삼촌이다. 나는 이 도시나 저 도시의 시민이며, 이 조합 아니면 저 조합의 회원이다. 나는 이 친족, 저 부족, 이 나라에 속한다. 따라서 내게 이로운 것은 그러한 역할과 관련된 사람에게도 이로워야 한다. 이처럼 나는 내 가족, 내 도시, 내 부족, 내 나라의 과거에서 다양한 빚, 유산, 적절한 기대와 의무를 물려받는다. 이는 내 삶에서 기정사실이며 도덕의 출발점이다. 또한 내 삶에 도덕적 특수성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매킨타이어는 서사적 설명이 현대의 개인주의와는 맞지 않다는 점을 기꺼이 인정한다. "개인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나는 내가 되기로 선택한 사람이다." 개인주의자들의 시각으로는 도덕을 고민하려면 내 정체성과 부담을 제쳐두거나 제거해야 한다. "내 나라가 한 일에 대해서는 내가 그 책임을 떠맡기로 직간접적으로 선택하지 않은 이상 내 책임은 없다. 이 같은 개인주의는 현대의 미국인에게서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미국 흑인에게 나타나는 노예제의 영향을 보고도 일체의 책임을 부인하면서 '나는 한 번도 노예를 소유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매킨타이어는 젊은 독일인의 예를 제시하는데, 이 사람은 "자기가 1945년 이후에 태어났으니, 나치가 유대인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든 현재 자신과 도덕적으로 연관성이 없다"고 믿는다. 매킨타이어는 이 예에서 도덕적 천박함을 발견한다. "나는 사회적/역사적 역할과 지위와는 별개의 존재"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자아를 서사적으로 보는 관점과 명확히 대조되는 입장이다. 내 삶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 정체성이 형성된 공동체의 이야기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는 과거를 안고 태어나는데, 개인주의자처럼 나를 과거와 분리하려는 시도는 내가 맺은 현재의 관계를 변형하려는 시도다.
따라서 인간을 자발적 존재로 볼 것인가, 서사적 존재로 볼 것인가를 결정하는 한 가지 방법은 사회계약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세 번째 범주의 의무를 인정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그 의무를 연대 의무 또는 소속 의무라고 말해두자. 자연적 의무와 달리 연대 의무는 보편적이지 않고 특수하다. 그 의무에는 우리가 떠안아야 할 도덕적 책임이 있다. 이 책임은 상대를 이성적 존재가 아닌, 역사를 공유하는 존재로 인식한다. 그러나 자발적 의무와 달리, 합의에 좌우되지는 않는다. 이 책임에 담긴 도덕의 무게는 소속된 자아라는 도덕적 고민에서, 그리고 내 삶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포함된다는 인식에서 나온다.
도덕적 책임의 세 범주
1. 자연적 의무 : 보편적이고, 합의가 필요치 않다.
2. 자발적 의무 : 특수하고, 합의가 필요하다.
3. 연대 의무 : 특수하고, 합의가 필요치 않다.
애국심이 미덕인가?
애국심은 논라인 많은 도덕 감정이다 .이를 반박의 여지가 없는 미덕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생각 없는 복종, 국가 우월주의 발상, 전쟁의 근원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 좀더 구체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같은 시민끼리의 의무는 다른 나라 사람에 대한 의무를 넘어서는가? 그렇다면, 그 의무를 합의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애국심을 열렬히 옹호하는 장 자크 루소는 공동체에 대한 애착과 정체성은 보편적 인간성에 반드시 덧붙여야 할 요소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감정은 그 범위가 전 세계로 확장되면 사라지거나 약해지는 성향이 있어서, 타타르나 일본에서 재난이 일어났을 경우 유럽 사람들에게 재난이 닥쳤을 때 같은 느낌은 오지 않는다. 이때 관심과 동정은 다소 제한적이게 마련이고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는다." 루소는 애국심은 제한하는 원칙이라며 다음과 같은 강점을 강화한다고 말한다. "같은 시민 사이에 응집된 인간성이 서로를 습관적으로 만나면서, 그리고 서로를 결합하는 공동의 관심사로 인해서, 새로운 힘이 생겨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시민들이 충직함과 동질성으로 묶여 있다면, 외부인들보다는 서로에게 더 큰 의무를 느낀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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