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의 핀볼
한없는 허무 속 불빛 같은 하루키 문학
권택영(문학평론가)
주인공 '나'는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작가 자신
1973년에 당신은 무엇을 하셨나요? 꼭 그해가 아닐지라도 우리는 지난날을 되돌아보았을 때 전환점이 되는 지점을 발견합니다.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서던 해, 깨달음을 얻고 다시 태어나던 해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새로운 시작은 절망의 끝이 아니었던가요? 입구가 곧 출구가 아니었느냐고 하루키는 묻습니다.
언젠가 하루키는, 전집을 묶으면서 단편들을 손질했지만 초기에 썼던 이 작품만은 손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것이 '당시의 나였고 결국은 시간이 흘러도 지금의 나'이기 때문이라고. 그렇다면 무엇이 변치 않는 자신의 모습일까? 잠깐 낮잠이 든 사이에도 나뭇잎이 시퍼렇게 커버리는데 변치 않는 것이 과연 있을까. 우리는 날마다 조금씩 죽어가면서 살고, 주인공 쥐가 말하듯이 "어떤 진보도 결국은 붕괴를 향해 가는데" 언제나 변함없는 나의 모습이란 과연 있을까.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인 라캉은 인간의 욕망을 이렇게 풀이한 적이 있다.
"길가에서 강도를 만났을 때 돈이 아까워 목숨을 내놓는 바보는 없다. 살기 위해 강도에게 돈을 빼앗긴 우리는 주머니가 텅 비었기에 늘 공허하다. 그래서 무언가에 몰두하고 누군가를 사랑한다. 그렇지만 사랑도 일도 텅 빈 주머니를 완벽하게 채우지 못한다. 살기 위해 돈을 빼앗긴 텅 빈 주머니, 이것이 불안과 허무의 근원이다. 그런데 그 주머니는 괴물이어서 우리가 성급하게 채우려 들면 오히려 심술을 부린다. 삶의 지혜는 이 요술 주머니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
하루키에게 이 텅 빈 주머니는 깊은 우물이다. 존재의 근원적 무로서 우물은 그의 소설에서 되풀이되는 중요한 은유다. 인간은 맑은 물을 얻기 위해 우물을 팠지만 그것은 동시에 우리의 발목을 잡는 함정이 되낟. 노르웨이의 깊은 숲 속에 있던 함정들처럼 우물은 인간이 살기 위해 파놓은 마음속의 우물이다. 그 위로 환상의 새가 날아다닌다.
삶의 한복판에 뻥 뚫린 우물, 결코 채울 수 없는 우물 때문에 우리는 환상을 만들지 못하면 살 수 없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을 안고 잠자리에 들듯이 우리는 환상의 알맹이를 동시에 볼 수 있어야 한다. 환상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면 우물의 깊은 나락에서 다시 지상으로 올라올 수 없기 때문이다. 깊은 우물을 어루만지면 나른한 슬픔, 그 한없는 허무 가운데 가느다란 불빛이 있다. 그것이 하루키 문학의 구원이다. 아픔 속에서 조심스럽게 지켜보면 얼핏 보이는 가느다란 끈, 그것이 하루키 문학이 우리를 사로잡는 이유다. 우리를 다시 살게 만드는 끈을 찾는 여행, 아무것도 아닌 삶에 아름다운 무늬를 만드는 긴 여행이 이 책의 주제이다. 그리고 주인공 '나'는 또 다른 인물 '쥐'이고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작가 자신이며 우리들의 모습이다.
나와 핀볼 -탐색이 대상인 동시에 반성적 주체인 핀볼
주인공 '나'는 먼 곳의 이야기를 듣기 좋아한다. 토성이나 금성의 이야기, 그에게 캠퍼스의 학생운동은 꽁꽁 얼어붙는 토성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고, 서른 살밖에 살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사랑은 습하고 무더운 금성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그러나 사실 토성과 금성은 자신의 대학 시절 두 모습이다. 혁명을 외쳤지만 실패할 수 밖에 없던 학생운동과 한 여자를 사랑했지만 죽음으로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기억들은 그의 과거지만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는 현실이다. 둘 다 환상이지만 현실이요, 기억이지만 여전히 그의 삶을 지배한다. 그러기에 학생운동의 부조리한 현장을 빠져나와 나오코와 나눈 사랑을 그는 아주 먼 곳에서 일어났던 이야기처럼 듣고 싶어한다.
1969년에 사랑하던 나오코가 무심코 했던 말 한마디가 4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를 지배하여, 그는 개가 있다는 시골의 작은 역을 찾는다. 나오코가 살았던 마을과 그곳 사람들, 아버지, 우물을 잘 파던 남자...... 나오코는 화자에게 우연이었으나 필연이 되고 말았다.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던 한 마리의 개를 보기 위해 그는 아무도 없는 역에 앉아 기다린다. 그리고 그 개를 본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그는 여전히 슬프다. 죽고 없는 그녀는 여전히 그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는 두 여자가 그를 맞는다. 두 여자 쌍둥이는 생김새도 똑같고 이름도 없다. 그들과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잠자리에 든다. 그는 시부야에서 사무실을 세 얻어 친구와 함께 번역 일을 한다. 일거리는 적당히 밀려들고 그는 일에 몰두할 때만이 마음이 편해진다. 기계적인 번역이기에 정확히 자신의 일을 해내고 사무실 여직원이 끓여주는 커피 맛을 즐기지만, 그는 그에게 맞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는 듯이 느낀다. 아우슈비츠나 2차대전 때 일본 유격기가 제자리가 아닐까. 과거를 벗어나지 못하며 허공에 부유하는 느낌은 차곡차곡 맡은 일을 하는 것만으로 지워지지 않는다. 그는 아무 곳에도 정착하지 못한다. 오직 단 한 곳, 커피를 놓고 나오코와 마주 앉은 그 자리에 여전히 앉아 있기 때문이다.
밖에서는 기계적인 번역 일로, 그리고 집에서는 그림자처럼 붙어 있는 쌍둥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그에게 배전반을 바꾸러온 사람이 낯설듯이, 시간은 과거 어느 지점에 멈춰져 있다. 쌍둥이 사이에서 잠을 자며 그들과 산책을 하고 대화를 나누지만 그들은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나오코의 그림자처럼 그저 그에게 붙어 있을 뿐이다. 죽은 나오코는 그가 피와 살이 있는 어느 누구와도, 열정을 부을 수 있는 다른 무엇과도, 교류하지 못하도록 그를 가로막고 있다. 너무도 외로워서 그가 창조해 낸 여자들일까, 집에서는 쌍둥이에게 의지하고 밖에서는 번역 일에 몰두하지만 그는 한때 핀볼이라는 기계에 미친 적이 있다. 나오코가 죽은 직후 한동안 그는 미친 듯이 그 기계를 사랑했다. 이렇게 하여 핀볼 이야기가 시작된다.
핀볼에 관한 소설은 1973년 5월, 그가 나오코가 말했던 개를 만나보고 돌아온 후 9월부터 시작된다. (…)
대학 강사인 핀볼 마니아는 화자가 찾는 모델이 전국에 단 세 개밖에 없으며 그것 가운데 그가 찾는 바로 그녀, '스페이스십'은 고철로 팔려 이미 망가졌을 것이라고 말해 준다. 핀볼에 관한 역사, 화자가 나누었던 그녀와의 접촉과 대화는 나오코와의 사랑 이야기보다 구체적이고 상세하고 열정적이다. 그러나 바로 그 열정의 크기는 나오코의 자리를 핀볼에게 바친 것이다. 마니아들의 열정을 묘사하는 하루키의 기법은 너무나 구체적이고 진지하여 독자를 감동시키낟. 그는 진부한 사랑 이야기를 이렇게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우회하여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텅 빈 주머니를 채우지 않고는 살 수 없기에 핀볼은 죽은 나오코를 대신하여 욕망의 대상인 '오브제 프티 아'가 된 것이다.
욕망의 대상은 살기 위해 만든 환상이지만 그것은 우리를 지배한다. 나오코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는 똑같이 핀볼의 행방을 추적한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를 차가운 지하창고에서 대면한다. 먼 외딴 곳의 커다란 지하 창고는 무덤처럼 차가웠고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못 나올 것처럼 공포의 분위기를 풍기낟. 그가 계단을 천천히 내려갈 때 78대의 죽은 기계들은 침묵을 지킨다. 콘크리트 바닥에서 죽은 닭 냄새를 풍기며 일렬로 서 있는 기계는 그가 나누었던 스페이스십의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신 탓이 아니야,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몇 번이나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잘못하지 않았어, 열심히 노력했잖아.
아니야, 하고 나는 말했다. 왼쪽의 플리퍼, 탭 트랜스퍼, 9번 타깃. 아니라니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지. 하지만 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할 수 있었을 거야.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어,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무엇 하나 끝나지 않았어. 아마 언제까지나 똑같을 거야, 하고 내가 말했다. 리턴 레인, 트랩, 킥 아웃 홀, 리바운드, 행잉, 6번 타깃.... 보너스 라이트.
21150, 끝났어요, 모든 것이, 라고 그녀가 말했다.
이 대화는 나오코와 나눈 대화가 아니다. 그가 핀불의 주술에 빠져 기계와 나눈 대화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나오코에 대한 그의 후회와 기억과 끝나지 않은 사랑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사라진 핀볼을 다시 만난다. 그런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부드럽고 따스한 연인이 아니라 차갑게 굳은 침묵의 현장이었다. 그는 "그런 식으로 그녀와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 쪽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기계들은 다리를 단단히 바닥에 박고, 갈 곳 없는 무게를 묵묵히 참고 있었다. 애처로운 광경이었다. 그는 혼자 노래를 부르고 말을 해보지만 기계들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지하실 창고에서 그는 마침내 잠든 기계를 깨울 전원 스위치를 찾는다. 갑자기 한 줄로 늘어선 기계들이 삶으로 가득 차고 한 대 한 대가 필드에 다양한 원색과 꿈을 그려낸다. 그리고 바로 그 스페이스십을 찾아낸다. 그는 그녀와 재회하고 하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눈다. 죽은 나오코와 핀볼을 통해 재회하는 이 장면은 이 소설 전체의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다. 그리고 그녀와 헤어지면서 그는 깨닫는다.
그녀는 방긋이 미소 지은 채 잠시 허공에 눈길을 주었다. 왠지 이상해, 모든 게 실제로 일어난 일 같짖가 않아.
아니, 정말로 일어난 일이야. 다만 사라져버렸을 뿐이지.
괴로워?
아니, 하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무無에서 생겨난 것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뿐인데, 뭐.
우리는 다시 한 번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건 아주 예전에 죽어버린 시간의 단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얼마 안 되는 그 따스한 추억은 낡은 빛처럼 내 마음속을 지금도 여전히 방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죽음이 나를 사로잡아서 다시금 무의 도가니에 던져 넣을 때까지의 짧은 한때를 나는 그 빛과 함께 걸어갈 것이다.
그는 나오코와 미처 나누지 못한 말들을 핀볼과 나누면서 깨닫는다. 그를 사로잡았던 환상의 실체는 차가운 침묵의 시체였다. 그리고 삶이란 단지 전원의 스위치를 올려 딱딱한 기계를 부드러운 온기로 채우던 아주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 사랑과 이해를 나누던 그 짧은 순간에 무에서 태어나 무로 돌아가는 우리들의 삶이었다.
어둡고 차가운 창고 속에서 누가 전원을 찾았고 스위치를 올려 밝은 생명을 불어 넣었던가. 바로 '나'였다. 삶이란 그리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혁명도 사랑도 가벼운 것이었고 그것이 우리를 살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었다. 우물이 여기저기에 함정을 드리운 현실에서 텅 빈 주머니를 채울 주체는 '나'이지만 그것은 무거운 혁명이 아니라 일상의 부드러움과 이해라는 가벼움이었다. 무거움은 우리를 사로잡아 고착시키낟. 그러나 가벼움은 불완전함의 영원한 반복이고, 그것이 삶이요 사랑이다. 그가 본 환상의 실체는 칙칙한 해골이었다.
불완전함의 반복은 환상의 실체를 볼 줄 알면서 동시에 그 환상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핀볼을 찾는 입구는 동시에 그것에서 벗어나 다시 시작하는 출구였다.
핀볼은 화자가 찾는 탐색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화자로 하여금 스스로를 볼 수 있게 해주는 반성적 주체였다. 그리고 이런 역동적인 중층 구조는 쥐에 관한 서술로 다시 한 번 되풀이된다.
나와 쥐 - 과거와 현재의 덫에 갇힌 쥐의 출구 찾기
이 소설에서 가장 구체적인 중심 이야기는 핀볼을 찾아 그녀와 마지막으로 상면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나오코의 실체와 대면하고 그녀와의 추억을 간직한 채 다시 살기 위해 그가 치러야 하는 경건한 의식이었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이런 나의 경험과 또 다른 인물인 쥐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그 역시 과거의 덫에 갇혀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그가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으나 학생운동과 관련되어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막연한 암시 외에, 분명히 제시되는 이유는 없다. 그는 섹스와 죽음이 없는 소설을 쓰려는 작가 지망생이다. 그러나 자주 드나들어 정이 든 45세의 중국인 주방장 제이와 나눈 대화에서 보듯이 25년을 살아오면서 "무엇 하나 몸에 익히지 못한다". 작가의 분신인 듯한 제이는 말한다. "아무리 흔하고 평범한 것이라도 인간은 노력만 하면 뭔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을 꺠달았다"고,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는 거지." 그러나 쥐가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좀 더 방황과 결단이 필요하다. 그는 맥주를 마시고 방황하면서 안개가 자욱한 항구 마을에서 떠나지 못한다. 그리고 그녀의 환상에 사로잡힌다. 어느 날 타이프라이터를 준 건축 기사인 그녀와 관계를 가지면서 그는 부드러움과 성실함에 사로잡힌다. 자신을 찾기 위한 그의 노력은 마침내 그녀의 환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결별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오랫동안 정이 든 제이를 떠나면서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난다. 자신을 사로잡던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나'의 핀볼 찾기와 엇갈려 서술되고, 핀볼과 상면하는 순간과 거의 같게 쥐도 출구를 찾게 해준다. 비로소 쥐는 소설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섹스와 죽음을 더 이상 거부하지 않을 소설가, 그는 바로 변함 없는 작가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핀볼에 관한 소설은 세 개의 이야기가 하나로 묶인 중층 구조를 이룬다. 혹시 하루키는 자신의 여러 가지 기억과 욕망을 이렇게 세 개의 이야기로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먼 훗날, <<해변의 카프카>> 에서 말하듯이 삶이란 불완전함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삶의 운전대를 잡고 완벽한 음악을 들으면 그는 자살하고 싶어질 것이다. 완벽함은 텅 빈 주머니를 단 한 번에 채워버리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삶은 우물의 함정이 파인 땅 위를 걷는 불완전함의 반복이다. 마치 같은 모티프가 다르게 반복되면서 음악이 태어나듯이 이 소설은 세 개의 서술이 다르게 반복된다. 그리고 그의 전 작품들은 우물의 모티프를 다르게 반복한다.
<<1973년의 핀볼>>은, 삶은 우리가 주인이 되어 전원의 스위치를 올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암시하는 소설이다. 입구는 출구요, 절망의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굳은 시체에 열정 불어넣기를 반복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썩어가는 몸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환상을 끝없이 다르게 반복한다. 마치 핀볼 이야기를 반복하듯이.
하루키는 훗날 다르게 되풀이될 아름답고 슬픈 나오코와의 사랑 이야기를 이렇게 다른 기법으로 제시했다. 인간의 사랑과 환상과 죽음이라는 진부함을 핀볼 마니아를 통해서 슬프고 아름답게 보여준다. 이것이 굳은 언어의 시체에 열정을 불어넣는 기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